나를 울린 마라토너/ 낌새/ 섬
- S. I -
“다시 태어나도 아빠와 결혼하겠느냐는/ 아이의 질문에 한참을 묵묵······ 하다가/ 다른 건 몰라도 너랑은 만나고 싶어/ 에둘러 답했더니/ 자긴 안 된다며 난감해 한다 이유인즉/ 이십여 년 전 출전한 마라톤 대회에서/ 있는 힘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란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우승 부상이 엄마인 이유로/ 필사적 질주 끝에 월계관은 썼지만/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숨이 차고/ 무릎도 써금써금하다며/ 이런 몸으로 재출전은 무리라 너스레다/ 만일 선두자릴 내주기라도 한다면/ 그땐 엄마와는 남남일 거 아니냐/ 장난삼아 낄낄대다가 돌연 정색하더니/ 그럴 바엔 차라리/ 지구별에 다시 오지 않는 편이 낫겠다며/ 끝내 눈물바람이다/ 예상치 못한 뜨거운 고백에 울컥해져
이 풍진 세상에/ 여자의 몸으로 와/ 여자를 낳은 일이야말로/ 내 생애 가장 잘한 일이라고
다만 속으로 속으로만 되뇌는”(P27)
“산새 죽은 자리 깃털 분분하다/ 먹고 싸는 일을 직방으로 해치우며 살아온/ 날 것의 최후답게 말끔하다/ 뼛속까지 텅 비었으니/ 해체도 간단했으리라/ 새로서야 몸의 하중이 가벼울수록/ 자유로운 비행이 수월해서라지만/ 새도 아닌 노모/ 사소한 동작에도 분질러지고 바스러져/ 툭하면 깁스 신세다 얼마 전엔/ 잇몸뼈까지 도려냈다 그뿐인가/ 지리는 일 잦아져 바깥출입도 삼간다
기필코 날고야 말겠다는 듯/ 하루하루 새를 닮아가는“(P61)
“네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 안경을 두고 왔다/ 나직한 목소리로/ 늙은 시인의 사랑 얘기 들려주고 싶어/ 쥐 오줌 얼록진 절판 시집을 두고 왔다/ 새로 산 우산도/ 밤색 스웨터도 두고 왔다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날을 몰라/ 거기/ 나를 두고 왔다“(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