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적인 역사적 삶의 조감도
- S. I. -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4·3사건은 공식 역사에서 오랫동안 ‘공산폭동’으로 왜곡되었다.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하고 긴 세월을 이어오던 섬 공동체를 일거에 파괴시킨 4·3사건의 진실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철저하게 은폐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건 이후 제주도는 ‘붉은 섬’으로 낙인찍혀 레드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4·3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떼죽음과 행방불명, 되새기고 싶지 않은 온갖 고통과 오욕의 체험, 사건 종결 후에도 따라다닌 정치적 핍박과 소외, 그로부터 입게 된 크나큰 심리적 상처”였다.
『순이 삼촌』이 발표될 당시만 해도 4·3사건은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4·3사건과 관련해서는 피해자들의 어떠한 신세한탄도 공개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나마 사람들은 제사나 굿마당에서 4·3사건을 이야기하고 울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이렇게 구전되던 4·3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전환시킨 최초의 소설이 바로 『순이 삼촌』이다. 문학에서만이 아니라 공식화된 문헌으로서도 최초였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오백위(位) 가까운 귀신들이 밥 먹으러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그러나 철부지 우리 어린것들은 이 골목 저 골목 흔해진 죽은 돼지 오줌통을 가져다가 오줌 지린내를 참으며 보릿짚대로 바람을 탱탱하게 불어넣어 축구공 삼아 신나게 차고 놀곤 했다. 우리는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힌 이야기. 왜 어른들은 아직 아이인 우리에게 그런 끔직한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려주었을까?
그리고 파제 후 이집 저집 지붕 위에 던져 올린 퇴줏그릇의 세 숟갈 밥을 먹으러 날 새자마자 날아드는 까마귀들도 기분 나빴다. 까마귀가 죽은 귀신의 혼령이라든가 저승차사라고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광택 있는 검은 날갯빛이 마을 어른들을 잡으러 오던 서청(西靑) 순경들의 옷빛하고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얕보던 까마귀들. 사람이 다가가도, 우여우여 소리쳐도 달아날 줄 몰랐다. 그것들은 시체가 널린 보리밭을 까맣게 뒤덮고 파먹다가······. 그 많던 까마귀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