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가 옳았다
- S. I -
"불변"이라는 말 그 자체가 시간성의 초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지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망실의 역사라고 비판한 서방인의 사유체계는 존재자로부터 존재가 사라졌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시간"이 사라졌다는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는 존재자의 의미이며, 존재자들이 가진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가리키는 말인데, 존재 그 자체 또한 오직 시간 속에서 고찰될 때만이 그 "있음"의 본래적 의미가 바르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존재로부터 시간을 공제해버리게 되면,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이 말할 세계, 즉 이성적 관념만으로만 파악되는 계량화된 법칙적 세계가 되어 버리고 만다.
존재는 초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내적인 것이며, 세계-내-존재의 주체인 현존재는 존재의 시간성으로 인하여 비본래적 자아를 버리고 본래적 자아로 회구하는 결단을 내일 수 있게 된다. 존재는 "있음"이며, 있음은 "시간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시간 밖에 어떻게 존재가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은 시간 밖에 있다면 그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시간 속에 있는 인간과 역사에 관여할 길이 전혀 없다. 예수도 갈릴리 역사의 지평 속에서만 존재 가능했던 것이다.
선에 대하여 불선을 말하는 것은 선 그 자체가 실체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동방인들은 윤리적. 심미적 명제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마음(감정)의 진락과 오질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시인하고, 그러한 감정으로부터 어떻게 인간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구성해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고민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감정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적 가치의 절대성, ㅈ,ㄱ 실체성을부인하고 보다 포섭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적인 세계를 구성해 갈 수 있다고 노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생명을 거스르는 "함"이 아닌, 우주 생명과 합치되는 창조적 "함"이며, 자연에 어긋나는 망위가 없는 "함"을 하는 것이다.
도는 결국 이 세계에 내재하면 이 세계 전체의 생성을 관장하는 힘이며 원리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