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을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책

강진군도서관 우리들 서평단 _ 이상원

김영하 작가 작품은 처음이다. 주로 30~40대가 좋아하는 소설가이지만 몇 달 전 tvN '알쓸신잡'을 통해 좀 더 광폭으로 대중에게 다가선 셈이다. 신선했다. 전문적이고 폭넓은 지식으로 TV프로를 같이 이끌어가는 다른 출연진과 잘 어울렸고 단연 돋보였다. 소설가라니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접하게 된 책이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소재와 구조는 독특하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치매환자가 '미래기억'을 갖기 위해 1인칭 시점에서 기록한 일지를 되읽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몰입도가 높고 스피드하다. 치매에 걸린 주인공의 결말이 궁금한 가운데 긴장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정작 결말에 와서는 이 책 내용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독자들조차 알츠하이머에 걸린 듯 오갈 곳 없는 절벽에 서게 된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기대할 법한 기승전결에서 결말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인공이 알츠하이머 환자이기 때문이다. 즉 '과거로 갈수록 선명한 기억과 달리 '미래기억'으로서의 기억은 점점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사라지는 치매환자의 증상을 소설적 구도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금강경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킬지니라.' 의 오역에서 살인자 김병수를 탄생시킨 작가는 반야심경의 '공즉시색, 색즉시공'으로 그의 생을 이끌어 간다. 김병수의 기록인 양 소설 중간 중간 던져놓는 죽음에 관한 철학적 명제들은 작가의 지적 영역을 가늠해 보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알쓸신잡' 에서 보여준 김영하만의 힘이고 소설의 파워인 것 같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끝내 그것을 살해하는 존재입니다' (p.8.)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를 연상시키는 건조하고 단단한 필력 또한 대단하다. 군더더기 없는 단문이 주는 서늘함이, 수의사로서 살인의 기록을 명확하게 잘하고 싶어 어쩌다 시집까지 내게 된 주인공의 설정과 맞아떨어지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그것은 그의 정신이 치매의 혼돈으로 점처럼 소멸되어가는 것과 동시에 몸도 '감옥같기도 하고 병원같기도 한' 곳에 갇히게 만드는 증거이자, 그의 생을 우리가 알도록 기록을 남기게 하는 장치이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p.145.)
 
흘러가는 시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막을 수 없다. 자신의 기억, 딸 등 기필코 지켜내야 하는 것이 있기에 알츠하이머를 이기기 위한 안간힘도, 사라져가는 시간도, 이러한 걱정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 파묻혀 이길 수 없다.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간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시집처럼 책이 얇아 2~3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화려한 수식어도 없고 미사여구도 없다. 영화로도 제작된 살인자의 기억법은 지속적으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받을 것 같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