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물과 바람과 같은 시

우리들 서평단_강현옥

표지를 본 순간, 얼고 들어온 나를 아랫목에 묻어주시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터진 볼을 비벼주시던 할머니는 94년을 사시고 돌아가셨다. 울고 들어온 시인의 꽝꽝 언 볼을 어루만져주신 그분은 누구실까?

"울고 들어온 너에게"에서 유독 다가온 단어는 아버지,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숱한 아버지들의 삶이었다. 도롱이를 입고 삽을 찾아 논물 보러 가는 아버지, 소를 몰며 밭을 가는 아버지, 칡잎에 싼 산딸기를 뚤방에 내려놓는 아버지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이러저러한 삶을 살아오면서 덜 것도 더할 것도 없이 살아낸 그는 자신의 탯줄을 묻은 자리로 돌아와 아버지처럼 살아간다. 국수를 파는 양식이, 회관 정자 기둥에 기대앉아 있는 종만이 어른, 다슬기를 잡으러 가는 이장 내외, 마루 창을 열고 앞산을 보고 서 있는 태주 어머니,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현이네 어머니를 관찰하는 시인의 눈길은 정겹다.

착하고 여린 그는 긴 겨울을 살아내는 새들도 걱정이고, 자갈 틈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는 달팽이도 걱정이고, 달이 무슨 힘으로 무게를 버텨낼까 걱정이다. 그 뿐이랴? 옻나무가 하루 종일 바람에 흔들리고 그 위로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83편의 시는 그의 소망대로 산과 물과 바람 같다. 온순하고 선하고 쉽다. 어느 날은 책을 외상으로 사들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고, 어느 날은 헌책을 짊어지고 들길을 걸어 성큼성큼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그는 창을 등지고 앉아서 책을 보았다. 날이 밝도록 글을 썼다. 이렇게 썼다.

나는/어느 날이라는 말이 좋다//어느 날 나는 태어났고/어느 날 당신도 만났으니까//그리고/오늘도 어느 날이니까//나의 시는/어느 날의 일이고/어느 날에 썼다// <어느 날 전문>

사느라고 애들 쓴다//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쉬는 날 전문>

어머니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자연이 하는 말을 받아 땅 위에 적는 어머니. 해와 달이, 별과 바람이 시키는 일을 알고 그것들이 하는 말을 땅에 받아 적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살아간 어머니, 그녀의 눈에는 깊고도 아득한 인류의 그 무엇이 있다고 썼다.

시인의 일상은 농부 같다. 몇 해를 걸어도 도로 그 자리인 삶.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돌아보면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고 있음에야. 그렇다고 실망할 것 없다. 그냥 사는 것이다. 해가 뜨고 달이 지듯, 바람 불고 새가 노래하듯, 사는 것이다.

시인이 손을 내민다. 이웃집 아저씨같이 하하하 웃으며 손짓한다. 이리 오라고, 사느라 수고하였다고. 아낌없이 위무할 태세다. 할머니가 언 볼을 녹여주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