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움직이는 지평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강진군도서관 우리들 서평단 _ 장찬구
 
 
문장은 살아있다. 살아서 꿈틀대다가 누군가에 다다르면 새 생명을 얻어 발현된다. 시에 사용된 언어는 더욱 그러하다. 일상의 언어 하나 하나가 세상에 떠돌다가 시인을 만나 문장으로 태어나는 순간, 시어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세상을 떠다닌다. 그래서 시는 상큼하다.

늦은 가을 시집 한 권쯤 옆에 끼고 세상을 거닐며 멍한 생각을 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오늘 소개하고자하는 시집 '오래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는 살아 숨 쉬는 문장의 참 맛을 느끼게 해주는 시집임에 틀림없다.

저자 이은규는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광주대학교 문에창작학과를 나왔으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시집으로는 '다정한 호칭', '오래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등이 있다. 두 번째 시집인 '오래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는 제20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시집은 총 네 단락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랑의 편애, 빗장뼈의 어원은 작은 열쇠, 편지 속 문장은 언제 도착할까요, 가까이서 멀리서 언제나.

각 단락의 시는 단아하면서도 깊은 언어의 형식이 자리하고 있으며 미학적 개성의 문장들을 만나 볼 수 있는 다수의 시가 웅크리고 있다.

이은규의 시세계는 시간의 흐름, 계절의 변화 , 희미해지는 기억 등을 반복이라는 형식을 통해 뱉어낸다. 반복은 그저 단순한 의식의 흐름과 읊조림이 아닌 자신의 안이함을 성찰하는 단계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도구로 자리 잡는다. 툭 뱉어낸 시어는 문장이 되고, 문장은 생명을 얻어 흩어져 또 다른 문장을 낳는다. 반복의 기법은 그러한 시인의 시간과 맞물려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에 말 못할 비밀은 없다
다만 들어줄 귀가 없을 뿐
절기마다 비밀은 아름다운 법칙으로 태어나고
광합성도 없이 한 뼘씩 자라나는 문장들
밤으로부터 새벽에게로
-중략-
저만치 오고 있는 절기
떨어지는 잎들이 비밀이 한창일 때
문장을 간직하는 것으로 잠들다, 깨어날 돌멩이
다만 들어줄 귀가 없을 뿐
세상에 말 못할 비밀이 있을까
-밤과 새벽의 돌멩이 중에서-(p54)

더듬거리며, 문장을 읽고, 시인의 생각을 읽고, 나를 읽는다. 깊어가는 가을 날 한 권의 시집을 품으며 꿈을 꾸듯 멍한 시간이 그립다면 당장 시집 한 권을 사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