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안 되는 세상

우리들 서평단_김미진

나는 무엇을 기대한 걸까... 항상 그렇듯이 책을 고를 때, 제목은 어느 새 얼굴마담이 된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의 변주 정도로 가늠하며 모처럼 가벼운 독서를 상상했다. 곧 그 기대는 꺾이기 시작했다. 고대 희곡의 주인공들을 비롯하여 연극에 대한 나의 무지를 들추어내는 것이 먼저여서 소설의 진로보다 연극 이론이 더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한 챕터를 담당할 만큼 연극에 관한 세밀한 정보는 액자소설처럼 이야기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어 쉬운 독서를 방해한다. 한편 지적 취미를 지닌 독자에게는 또 그만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소설에 집요하게 차용되는 연극은, 문학과 연극을 통해 민주주의를 말해야했던 시절 무자비한 권력을 향한 대응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작가가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틀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은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모티브로 등장인물 다섯 명의 시선을 통해 80년대 사회 현상을 조명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관여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음이다. 전설의 학생운동가 최민석, 그를 쫓는 정보요원 김기준, 최민석 검거를 위한 기준의 각본에 따라 조종당하는 삶이 되어 버린 김진아와 이태주가 각각 주인공이었다가 누군가의 선한 이웃으로 집약 되는 방식이다.

작가에 의하면 소설 제목 <<선한 이웃>>은 반어적 표현이다. 선(善)은 의도, 행위, 결과 모두를 고려한 정의라 할 때, 사람은 누구나 의도는 선할 수 있음을, 그러나 그 행위와 결과는 나쁠 수 있음을, 그러므로 의도만으로 '선'을 판단할 수는 없음을 역설한 것이다. 세계가 <엘렉트라의 변명>처럼 비극적 면모를 갖고 있음을!

권력 앞에 서슴없이 괴물이 되었던 사람들, 악이 그들의 정의이자 전부였던 시절이 과연 과거로 모두 흘러간 것일까? 생존을 위해 부역하는 개인과 그 힘없는 개인을 혼돈과 절망으로 몰아가는 거대 권력, 정의가 도구적 가치로 굴절되는 세상은 아듀인가? 곧 선거가 시작된다. 내 지지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나는 다른 지지자에게 가장 성실한 너에게 서로 악이 되는 것을 극명하게 체험할 무대가 펼쳐질 때 작가가 고민하는 지점에 서게 될 것이다. 누가 선한가? 선한 이웃으로 사는 법에 대하여 소설의 재미를 따라 잠깐이나마 생각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